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심리극입니다. 제레와 겐도가 추진하는 인류보완계획, 그 중심에 놓인 이카리 신지의 선택, 그리고 자기혐오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작품은 거대 로봇 전투라는 외피 아래 인간관계의 고통과 치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류보완계획의 진실과 제레의 목적
제레가 추진하는 인류보완계획은 표면적으로는 인류를 구원하는 계획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개인의 자아를 소멸시키는 집단 자살입니다. 사도를 격퇴하기 위해 네르프를 설립하고 반기를 든 게도를 죽이기 위해 전략자위대와 양산형 에반게리온을 투입한 제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도나 사도의 복제품인 에바를 이용해 제18사도, 즉 인류의 모든 영혼을 하나로 합쳐 초월적인 존재가 되려 합니다. 이는 수십억 개의 자아가 상실되는 대규모 집단 자살을 실행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카리 겐도는 제레의 보완계획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합니다. 코어에 갇힌 유이와 다시 만나기 위해 독자적인 보완계획을 세운 겐도는 초호기의 유이의 DNA까지 빼낼 수 있었지만 영혼까지 빼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인류의 모든 영혼을 초호기에 옮겨 유이와 재회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겐도는 사도 중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제1사도 아담과 제2사도 릴리스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고, 태아 형태의 제1 사도를 자신의 손에 이식하고 제2 사도의 영혼을 유이의 DNA로 만들어진 육체에 집어넣어 수백, 수천 개의 아야나미 레이를 제작하게 됩니다.
겐도는 파일럿을 사용하지 못할 유사시에 대비해 레이를 기반으로 더미 플러그를 제작하고 에반게리온 영호기 코어에도 사용하며, 영호기 파일럿으로 레이를 이용하고 레이의 환심을 사 자기 입맛대로 통제하기 위해 그녀 앞에서만큼은 자상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연기합니다. 이러한 인류보완계획의 이중 구조는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거대한 이념으로 포장되는지를 보여주며, 영화는 이를 통해 집단과 개인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신지의 선택과 레이의 배신
10년 전 기차역에서 자신을 버리고 에바에 타 극한의 고통을 느끼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겐도가 레이와 즐겁게 대화하며 미소를 짓고 레이를 아끼는 모습을 보게 된 신지는 자기가 받지 못한 사랑을 독차지한 레이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레이, 어머니가 연상되는 레이의 외모, 같은 에바 파일럿이라는 점과 자신은 무가치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었던 신지는 레이에게 지속적으로 호감과 관심을 표하며 대화를 시도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아스카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신지를 이기기 위해, 처음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신지가 미사토에게 네르프 직원들에게, 아버지에게 칭찬받기 위해 에바 초호기에 탄 것처럼 자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겐도에게 보답하기 위해 에바 영호기에 타는 레이. 하지만 레이는 자신을 말 잘 듣는 인형으로 보는 겐도에게 회의감이 들게 됩니다. 자신을 아끼고 자상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큰 부상을 입은 자신에게 출격을 명령하고 수백 수천 개의 클론을 제작해 보완계획의 버림 패로 사용하고 유이와 재회하기 위해 인류보완계획이라는 기적에 집착하는 겐도와 달리,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공포를 애써 억누르며 에바에 타겠다고 결정하고 득 계산이나 이해타산 없이 자신을 동료이자 친구로 대하는 신지에게 끌리게 됩니다.
전략자위대가 네르프를 습격하고 카오루가 죽고 미사토가 죽고 처참히 찢겨 나간 에바 2호기를 보고 아스카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은 것을 알게 된 신지는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태아 형태의 제1 사도를 이식받아 힘을 얻게 된 레이는 신지의 비명을 듣고, 신지가 자신을 구해준 것처럼 괴로워하는 신지를 구해주겠다고 결심하며 겐도를 배신합니다.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겐도를 뒤로하고 제18사도 태아 형태의 제1 사도, 제2 사도와 융합하게 된 레이는 혼자서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고 신지와 만나기 위해 몸집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계산된 통제와 진심 어린 관계의 차이입니다. 레이의 선택은 인형처럼 조종당하던 존재가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자기혐오 극복과 타인과의 접촉
수천 미터에 육박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레이를 보게 된 신지는 극한의 공포와 스트레스에 지금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 합니다. 레이는 신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제1 사도에서 비롯되었던 사도 기사 카오루를 내세우고, 카오루와 재회한 신지는 달콤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레이는 신지의 의사를 묻게 됩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버려진 신지는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했지만 그 이상으로 타인에게 미움받고 거절당하는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레이의 힘으로 사망한 미사토와 아스카의 영혼, 그리고 레이와 대화하며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겐도의 계획에 사용되는 인형이었던 레이는 아스카나 신지 이상으로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신지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고, 타인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일주일 넘게 카지와 지속적인 성관계를 하고 카지를 잃은 후에는 신지를 위로해 준다는 명분으로 양아들인 신지와 관계를 가지라고 할 정도로 타인에게 사랑을 극도로 갈구하는 미사토 또한 타인인 신지를 사랑하고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지는 아스카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아스카는 신지가 타인을 좋아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을 간파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타인에게 거절당하고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신지에게 타인은 좋아할 수 있는 대상,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그저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상관없으니 자신을 긍정해 주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해주고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퉁명스러운 태도를 취한 아스카라면 거절당해도 상처를 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스카가 꼭 필요하다고 신지는 거짓말을 하고, 아스카는 이를 간파합니다.
만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인류를 지키기 위해 극한의 고통과 공포를 참아가며 사도와 싸워 자신을 미워했던 토우지와 친구가 되고 목숨 걸고 아스카를 구출하고 에바에 타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 에바 파일럿을 그만뒀을 때도 네르프가 위기에 처하자 그렇게 타기 싫었던 에바에 다시 타서 모두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겐도로 인해 거절에 대한 극심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고 미사토와 아스카는 신지처럼 낮은 자존감과 자기혐오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신지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모두의 조언을 받은 신지는 거절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닫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보완이 완료되고 레이는 신지가 바라던 세계가 완성되었다고 말하지만, 신지는 미사토를 보며 그녀의 조언을 떠올립니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미사토의 조언을 기억하고 모두의 축하를 받은 신지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겐도 같은 삶이 아닌 타인도 없고 자신도 없어 상처받을 일이 없는 인류보완계획 같은 도피처가 아닌 현실 세계를 선택합니다. 잘못된 진실이 아닌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에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타인과의 접촉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선택은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도 도피하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용기의 표현입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앞으로 더 나아지고 다 잘 될 거라며 무책임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신지, 미사토, 아스카 같이 부모에게 타인에게 상처받은 캐릭터들을 내세워 공감을 준 다음,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고 행복해질 수 있으니 자기혐오에 사로잡혀 인류보완계획이라는 자살에 이르지 말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말라는 자그마한 위로를 전합니다. 화면 연출과 음악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차갑고, 등장인물들의 불안, 외로움, 자기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관객을 버겁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거대한 사건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집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신세계를 살아나갈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20세기말에 제작된 명작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KemrEGPiR4w?si=2zcSiUG7zvyRwL6F